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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사망선고

  • 연도2020년
  • 수상금상
  • 이름박천숙
  • 소속미래아이여성병원
시원한 산들바람이 훅 하며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햇볕과 그들이 번갈아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용모양의 구름에서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있다. 눈을 감고 오랜만의 신선한 바깥 공기를 코로 깊숙이 들이쉬었다. 살 것 같다!?
“ 선생님, 갈 길이 멀어요. 어서 타세요. “
119 기사님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탄다. 나는 조금전에 시골의 조그만 마을의 어느 집에서 막 사망선고를 하고 나오는 길이다.? 내가 인턴을 할 당시에는, 회생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환자의 경우, 보호자가 원하면 집에서 사망할 수 있었다. 상태가 나쁜 환자를 119에 태우고 의사가 암부를 짜며 환자의 집에 가서 기도관을 제거한 후, 심장이 멈추면 사망선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환자들은 대개 장기간 병원 치료로, 이미 육체는 뼈와 가죽뿐이고 그 피부는 거무튀튀하여, 영혼이 아직 깃들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기계와 약에 의존하여 심장만 겨우 뛰고 있는 상태라 기도관을 제거하면 거의 대부분 곧 심장이 멈추었다. 그러면 나는 형식상 청진하고, 맥을 집어보고, 동공 반사를 본 후 조심스럽게 사망선고를 했다. 가족들은 조용히 받아들이기도 하고 오열하기도 했는데, 나의 딜레마는 항상 그 자리를 언제, 어떻게 잘 빠져 나오는지였다. 그냥 바로 나오기도 좀 그렇고 오래 머물기도 좀 그래서, 환자로부터 제거한 기도 유지 장치와 몸에서 제거한 각종 링거바늘들을 천천히 챙기며 눈치를 보곤 했다. 그리곤 그 제거한 물품들을 챙겨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것까지가 인턴의 임무였다.?
잠도 부족하고, 정신도 없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숨이 차다고 전화가 왔다. 낮엔 바빴고, 그 날 밤도 피곤에 찌들어 겨우 전화를 받았다. 받고 보니, 낮부터 여러 통의 전화가 이미 온 상태였다. 사실, 당시에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그 순간부터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곤 했다. 특히, 사채업자랑 통화한 다음부터는 더 심해졌다. 모르는 번호가 찍혀도 불안감에 손이 떨려왔다. 아버지는 주로 돈이 필요해서 전화를 하셨고, 두어 번은 밤에 약주를 드시고 길에 쓰러져서 경찰이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 지영(나의 아명)이냐.....내가 숨이 좀 많이 찬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순간 오히려 돈 얘기가 아니라서 안도했다. 밤이 늦었으니, 낮에 근처 내과 병원에 가보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버지가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의뢰되었고, 우리 병원에서 폐암을 진단 받았다. 처음 동네 병원에 갔을 때부터 이렇게 폐에 물이 많이 찼는데 어떻게 계셨냐고 했다 한다. 거의 폐가 물에 잠겨 있었던 거다. 이 때의 섭섭함을 훗날 아빠는 애둘러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 넌 의사니까 워낙 중환을 많이 봐서 그런건 별 일도 아닌거라."
이미 4기라 수술도 불가능해서 항암치료를 해야 했는데, 나는 이 사실을 솔직히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진 아직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다. 그래서 폐암인데 일단 치료를 해봐야한다고만 했고, 아버지는 폐에서 조직검사 한 것을 수술로 생각하셨다. 그 때부터 몇 개월간 나의 간병 아닌 미숙한 간병이 시작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었고 - 그 해의 여름은 또 유난히도 무더웠다. 무더운 여름은 폐암환자에겐 더욱 더 잔인한 계절이다. 가뜩이나 숨 쉬기가 어려운데 덥기까지 하니 아버지는 더 숨이 차 올랐다. 식사하고 조금만 걸어가도 한참을 서서 숨을 돌려야 했고, 육교를 올라간 어느 날은 거의 숨이 차서 쓰러질 뻔 하셨다. 얼굴이 새카매져서 가슴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산소를 들이마시려 애쓰는 아버지를, 의사 딸은 그냥 옆에서 속수무책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어느 날은, 집에서 호흡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는 진통제 패치를 2개 붙이셨다가, 그것 때문에 돌아가실 뻔하기도 했다. 나는 오프가 날 때마다 아버지랑 병원 근처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거의 드시지 못하셨지만 내가 잘 먹는 걸 보면 조금은 식욕이 돋는다 하셨다. 나로선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 네 엄마가 해 주는 된장국이 먹고 싶다..."
또는
" 집에서 숨 쉬기가 너무 힘들다..혼자서 힘들어."
하시면 짜증이 났다.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이고, 병원비도 모두 내 부담일 뿐 아니라, 병원 일도 많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좀 외출이 되고 편한 과를 돌 때, 그래도 아버지랑 같이 있어드리고, 얘기를 나누고, 같이 밥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잠도 못 자고 일 해야 했던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힘들었다.
애초에 말기였던 암은 항암제로 쉬 잡히지 않았고, 아스팔트를 녹이던 더위가 가을 바람에 서서히 등 떠밀려갈 때쯤, 결국 치료를 포기하고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공동 간병인이 딸린 곳이라, 지칠대로 지쳐 있던 나는 아버지 찾아 뵙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그래도 갈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무지 반가워하셨다. 복도를 열심히 눈으로 쫓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시면
"지영아! 여기,여기"
하며 나를 부르셨다. 목소리가 쉬어서 작았지만, 팔을 위로 쭉 뻗어 흔들며 함박웃음을 웃으셨다. 아버지는 6인실에 계셨는데, 그렇게 손을 흔들지 않으면? 내가 못 찾기라도 할듯이, 요란하게 나를 반기셨다. 그러나 막상 반가워는 해도 딱히 말씀은 없으셔서 같이 tv를 보거나, 잠깐 앉아 있다가 오곤 했다. 그러다가 바쁜 과를 도느라? 2~3주쯤 안 갔나 보다. 부랴부랴 요양병원을 찾았더니, 아버지는 산소를 코에 꽂고 멍하니 앉아 계신다. 멀리서 보니, 동그마니 등을 말아 마치 조그만 아이가 앉아 있는 것 같다. 내가 복도를 지나가도 "지영아!" 하면서 손을 흔들어 부르시지를 않는다.
" 아빠! 괜찮아?"
내가 부르자,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신다.
"응. 지영이 왔나."
요전번처럼 그렇게 반가워 하지를 않으신다. 그러곤 곧 초점 없는 눈동자는 멍하니 무언가를 찾아 달아난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워낙도 여윈 체형이신데 못 뵌 사이에 살이 더 빠졌다. 식사가 왔지만 거의 드시지를 못해서 내가 먹었는데, 콩자반도 딱딱하고 음식이 영 먹을만하지 못하다. 무심했던 나와, 이런 음식을 제공한 병원 모두에 화가 났다.?
" 기저귀가 너무 불편해.."
이제 걸을 기력도 없으시니 화장실에 부축하기가 귀찮은 간병인이 기저귀를 잔뜩 채워 놓았다. 저래서야 눌려서 소변을 볼래도 볼 수가 없겠다. 나는 그걸 모조리 빼내 버리고 화장실 가시는걸 부축해드렸다. 화장실 안에서 변 보시는걸 도우면서 깜짝 놀랬다. 변에서 냄새가 전혀 없다.?
나는 다음달 당장 정관장에 가서 젤 좋은 홍삼 액기스를 사다가 떠먹여 드렸다. 다른건 전혀 못 드시던 아버지가 그건 좀 받아드셨다. 그러더니
"맛있구나."
하셨다. 나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진작에 사드릴걸. 맛있다고 하시는걸 얼마만에 듣는 말인지.
" 아빠, 죄송해요. 제가 죄송해요."
아빠는 멍하니 멀리를 보고 계시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대답하셨다.
"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괜찮다…."
그 날은 요양병원에서 목욕시켜주는 날이었는데, 하기 싫어하는 아버지를 내가 억지로 종용해서 목욕을 하셨다. 누운 채로 간병인들이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었는데, 안에서 계속 아버지의 애처로운 소리가 탕밖으로 들려왔다.
"뜨ㄷㄸㄷㅌ"
한참이 들리길래 내가 밖에서 참다 못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아버지가 뜨겁다 하시는거 같아요!"
목욕 시켜주시는 분 3명이서 일제히 돌아보는데, 그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가뜩이나 여위어서 피부가 얇아진 아버지가 뜨겁게 느껴도, 그들은 알지 못한 것이다. 괜히 목욕을 하자 했나 나 자신에게 또 화가 났다.
그 날 밤 병원에서 당직 서고 있는데 간병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나를 애타게 찾는다 하였다. 전화를 바꿔달라 했더니,?
"지영아...와줘..무서워..",
하신다. 아프기 전엔 내게 마음의 짐인 아버지였다.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미안해 하며 어렵게 전화를 하셨지만, 나는 그럴때마다 매몰차게 대하곤 했다. 편찮으신후, 아버지랑 보내는 시간들이 생기면서, 나는 아버지의 새로운 면면을 많이 발견하였다. 아버지는 한자를 멋지게 쓸 줄 알고, 글도 잘 쓰셨으며, 매번 실패하긴 했지만 자식을 위한 노력들도 많이 해오셨던 분이셨다. 어떻게 보면 사회의 중간 하층이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더 똑똑한 분이셨다. 편찮으신 후에도 내가 가면 너무나 반가워하셨으나, ‘일 하느라 바쁘지’ 하며 일부러 나를 찾지 않던 아버지였다. 처음으로 나를 찾았던 그 날 밤 -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직인 데다가, 너무나 피곤해서 갈 수가 없었다.
" 아빠. 내일 날 밝으면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날이 밝을 거에요"
" 응. 그래. 그래. "
나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잘 부탁드린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 뒤로 아버지가 ' 날 밝으면 우리 딸이 온대' 하며 간병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끊은 후 이상하게 잠 들 수가 없었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날이 밝으면 빨리 가야지…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 나는 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을 정리하고 빨리 나서려 했으나 일이 꼬여서 정오까지도 병원에 매여 있을 때였다. 요양원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조금전 돌아가셨다 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 바빠서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인턴 막바지로, 산부인과에서 픽스턴으로 일하고 있을 때 사망선고를 하러 또 떠나게 되었다.?
이번엔 전라도 순창까지 암부를 짜고 가야했다. 환자는 비교적 젊은 50대의 복막암 말기 환자였다. 이 분은 이미 우리 병원에 올 때부터 복막암 말기였다. 대개 암투병을 오래 하게 되면, 돈도 돈대로 쓴 상태이고 가족들도 지쳐 있다. 당시엔 암 수술하고 항암 치료 오랫동안 하면, 소 팔고 집 팔고 한다 했다. 슬슬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하고 바랄 때가 온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1년여를 더 버틴 것도 거의 기적 같았다. 그러나, 결국 이미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고,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져서 중환자실에 있다가, 가족들이 객사를 원치 않는다 하여 집으로 가기로 했다. 몇 시간이나 응급차로 달렸을까… 환자의 집에 도착했다. 나는 의례히 해왔듯이 기도관을 제거하고 자발호흡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심장박동이 멈춘 것을 체크하고 사망선고를 하려고 했다. 숨이 멈춘 환자의 얼굴은 차분하고 평안했다. 마치 집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어 마음이 편한 듯 하였다. 그 얼굴을 보며 사망선고를 하려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꽉 매였다. 첨에는 기도관을 제거해도 가족들은 어느 순간이 사망인지 몰라 어쩔줄 모르는 분위기였다.
“ 임**씨, 20**년 *월 *일 **시 사망하셨습니다. “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사망선고를 하자, 조그맣게 훌쩍거리던 딸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 엄마! 어떡해요, 엄마… 평생 여행도 한 번 못 가고. 엉엉. 고생만 하고. 엉엉"
그러자 남편도 소리 내어 울고, 아들,딸도 소리 내어 울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려내렸다. 돌아가시는 아버지 앞에서 울어야 했던 울음이었다. 의사이면서 병이 그 지경이 되도록 알지도 못한 딸, 치료 과정내내 치료비 걱정만 한 못난 딸, 그렇게 드시고 싶어하시던 된장국도 한 번 손수 끓여드리지 못한 딸,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한 딸은, 의지를 넘어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다른 사람 사망선고 하는 자리에서 같이 끅끅 가슴 아픈 울음을 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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