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보령의사수필문학상

수필은 마음의 산책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 피천득의 '수필'중에서

7월의 숙제

  • 연도2020년
  • 수상은상
  • 이름김강석
  • 소속로뎀요양병원?
달력이 달랑달랑 한 장만 매달려 있는 겨울이 오면 매년 어김없이 처가에 내려가 김장을 한다. 결혼 후 벌써 열 번도 넘게 내려갔으니 익숙해 질만도 한데 아직도 초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손이 크신 장모님께서는 적게는 200포기 많게는 300포기씩 배추를 절이신다. 직접 농사를 지으시다 보니 배추밭에서 배추도 캐야 하고, 파도 뽑아야 하고, 마늘도 까야 하고 재료 준비서부터 할 일이 태산이다.
"장모님, 제발 내년에는 100포기만 해요. 요새 이렇게 김치 많이 담그는 데는 김치 공장밖에 없어요"
"알았어. 올해는 배추가 워낙 잘 자라서 그랴. 놔두면 뭐하겄어 내년에는 진짜 조금만 할텨"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14년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철없는 사위는 장모님 속도 모르고 매년 투정이다. 손은 얼고 눈도 맵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다. 산더미처럼 쌓인 절인 배추를 보고 있노라면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거기다 이상하게 김장하는 날만 되면 왜 이리 추운지 기상청 한파예보는 이럴 때만 꼭 들어 맞는다. 언 손을 녹여가며 마당 한 켠에서 배추를 헹궈 차곡차곡 쌓아두고 집안에선 무채 썰기부터 김칫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김장 양념 버무리는데도 한나절이 걸리니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온 식구가 달려들어 금요일 아침부터 시작한 김장은 일요일 점심에서야 드디어 끝이 보였다. 피곤해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올해도 속아서 250포기나 했다고 구시렁대는 사위를 보고 장모님께서는 겉절이에 수육 한 점을 얹으시더니 다짜고짜 입에다 밀어 넣는다. 반칙이다. 이걸 먹고 나면 다시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곧이어 남은 양념에 생굴을 무쳐 한 접시 가득 두고 가신다. 이쯤 되면 계속 힘든 척 생색 내려던 나도 무장해제 상태가 된다. 거부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보상이다. 김장 좀 줄이자고 시위를 하려던 나는 어느새 조용히 밥상 앞에 앉아 젓가락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연례 행사가 되어버린 김장 덕에 식탁에서 김치가 떨어지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 해 매서웠던 겨울도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듯 했다. 
설 명절에 다시 뵌 장모님께서는 평소보다 잔기침이 잦아지신 듯 보였다. 감기약을 달고 산다고 말씀하셨는데 봄이 되어도 차도가 없는 듯 하셨다. 치아가 시원치 않아 그런지 체중도 많이 줄었다고 하시는데도 나는 치과진료 좀 받으시라고 타박만 했다. 설마 무슨 이상은 없으시겠지. 그 때도 내가 너무 무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건강 검진 결과 장모님 폐에 이상 소견이 보이니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제서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기관지 내시경과 CT 촬영을 하고, 병원에서는 악성 소견이 의심되니 한달 후 다시 재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길 바랐다. 
"장모님, 몇 년 전에 외할머니도 폐암 같다고 했는데 재검사해서 괜찮았잖아요. 별 일 아닐 거에요. 걱정 마세요. 사위가 의사인데 그런 병 하나 못 고치겠어요?"
"그려. 걱정 안 할겨. 괜히 병원에서 겁주는게벼"
"코로나 조심하시고 마스크 잘 쓰고 다니세요. 곧 있으면 생신인데 또 내려갈게요."
"그려 그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안되어 장모님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해 흉관을 삽입했고 다시 조직 검사를 나갔다. 결과는 4기 폐암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전화를 받고 퇴근길 내내 멍해 있다 아내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달리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표적치료제가 잘 듣길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약이 효과가 있다면 적어도 일 년은 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을까? 
"그래도 수술은 안 해도 된다니께 약 먹으면 나아지겄지? 얼매나 다행이여 나는 암이면 무조건 수술해야 하는 줄 알고 겁먹었당께" 
"그럼요 요새는 폐암 치료제가 워낙 좋아져서 먹는 약도 잘 들어요."
폐암이라는 얘기에 근심 가득하신 장모님께는 초기 암이라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둘러댔다. 장모님께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며 담당 교수님께 연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아무것도 모르신 채 병원을 빠져 나왔다. 그 때는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때라도 솔직하게 말씀 드리고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드렸어야 했나. 무엇이 정답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내겐 너무 어려운 숙제다. 장모님께서는 퇴원 후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곧 항암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눈감더라도 우리 애들이랑 바쁜 사위 고생 덜 하게 금요일 밤에 떠났으면 좋겄어."
"아니 장모님 올해는 김장 안 하시려고요? 왜 벌써 그런 생각을 하세요. 올해는 몸도 안 좋으신데 진짜 조금만 해요."
"그려 그려"
"그리고 정 힘드시면 우리 병원으로 제가 모시고 갈게요."
이 와중에도 사위 끼니 챙겨줘야 한다며 부엌을 들락날락 하시는 장모님을 뵈니 처가에 더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아프다고 이기심을 부리셔도 될 텐데 지금도 당신보다 자식들 걱정이시다. 
"저희 올라 갈 테니까 푹 쉬시고 많이 힘드시면 꼭 응급실로 가세요."
이제 항암제 드시니까 괜찮으시겠지. 흉수 찬 것도 뺐으니까 별 일 없으시겠지. 결국 내가 다 틀렸다. 0점짜리 답안지를 내고 이제 와서 번복할 수도 없게 돼버렸다. 청진기라도 들고 가서 숨소리라도 한 번 자세히 들어볼 걸. 왜 그땐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집에서 뵙는 마지막 모습일 줄 알았으면 더 있다 왔어야 했는데. 이부자리라도 한 번 봐드리고 올 걸. 늦은 후회가 밀려와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그로부터 나흘 후 장모님께서는 숨이 너무 가쁘다며 재입원을 하셨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점점 두려워졌다.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부쩍 수척해진 장모님께서는 아내 손을 꼭 잡고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약한 소리 그만 하시고 퇴원하시면 무조건 우리 병원으로 모시고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부디 이번 고비만 넘기시길.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그저 하루하루 아무 일 없길 바라며 회진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대전 ㅇㅇ병원입니다. 환자분이 위독해서 중환자실로 모시고 기관삽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심정지 올 수도 있는데 심폐소생술은 하실 건가요?"
내가 보호자들에게 수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다. 이렇게 비수로 가슴을 가르는 말일 줄은 몰랐다. 병원에서 대기하던 처제가 차마 결정을 못하고 형부가 의사라고 연결시켜 준 모양이다. 
"제가 지금 갈게요. 제가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꼭 살려주세요." 
너무 목이 메어 간신히 몇 마디 뱉어냈다. 지금은 너무 이른 이별이다. 잠깐 안 좋아 지신 거겠지. 이까짓 것 못 이겨낼 장모님이 아니신데. 혹시 오진은 아닐까?  
2시간을 달려 기계음만 울리는 적막한 중환자실에 도착했다. 인공호흡기와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들 사이로 힘겹게 버티고 계신 장모님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결국 그 날의 짧은 면회가 내가 장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틀 후 장대비가 쏟아지던 금요일 밤 중환자 대기실을 지키던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엄마 돌아가셨어 오빠.’
처갓집에서 딸아이와 조카들을 돌보고 있던 나는 애들이 놀랄까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새벽잠이 덜 깬 아이들을 차에 태워 장례식장으로 나섰다. 밤 사이 쏟아지던 비가 그치더니 너무나 쾌청하고 눈부신 아침을 내주었다. 오시는 조문객들 힘들까 봐 이리 화창한 날씨를 선사해 주신 건지. 눈감으실 때까지 자식들 걱정만 하시더니 당신 바람대로 금요일 밤에 떠나신 건 아닌지. 장례식장에 걸린 영정 사진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김장도 서툴던 사위는 마지막 보내드리는 길도 이렇게 서투르다. 
일요일 아침 발인을 마치고 장모님은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던 외할머니 곁에 모셔드렸다. 그 곳에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셔야 할 텐데. 다시 그 겨울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어야 옳았을까? 내 평생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아직도 마음으로는 놓아드리지 못한 장모님께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장모님의 빈 자리가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장모님께 받은 사랑은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가 되어 갚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고 더 이상 아프지 마세요 장모님.

TOP